문화일보 9월 16일(화) 3판 31면 포럼 ‘미래를 위한 바른 교육, 바른 교과서’↓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091601033137191004
지면 매체의 경우 종종 편집과정에서 필자의 의도대로만 편집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위의 글이 선생님의 의도의 전부를 담고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글에 대한 선생님의 변론을 기다립니다. 물론 빨리 노출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오래 기다리고자 합니다.
일단 시도 교육감 협의회가 고고 2·3학년이 사용하는 근현대사 교과서를 선정할 때, 이념적으로 편향되지 않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기술된 교과서가 선정되도록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부분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지난 10년 동안…기존 정통 역사관과는 매우 다른 ‘수정주의’…‘민중주의’, 이른 바 ‘반(反) 대한민국적’인 ‘자학사관’에 빠져 있다.”고 주장하셨더군요.
그러나 선생님, 편향된 것과 그렇지 않음, 그러니까 ‘중립적임’을 구분하는 자가 개인이어서는, 또 어느 특정 세력이어서는 곤란하다고 저는 봅니다. 수정주의가, 민중주의가, 반미주의가 옳다고 주장하는 이에게도 그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이를 반대해 재수정주의가, 본원주의가, 엘리트주의가, 친미주의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도 그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교과서는 이를 수렴할 점을 찾는 것이 본연의 임무이지만, 만약 둘이 전혀 만나지지 않으면 그 두 시각을 모두 실어 중립성을 지키는 편이 옳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지난 10년간 그 누구도 역사를 뒤집지는 못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만약 지난 10년간 역사를 뒤집는 일이 있었다면 그 때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성인이 된 이 시점에 뭔가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났어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민중봉기가 일어났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뒤집힌 것이 없습니다. 10년간 선생님의 생활은 얼마나 윤택해지거나 궁핍해졌는지 모르겠지만 어려운 이들은 여전히 어렵고, 쉬운 이들은 여전히 쉽습니다. 게다가 더욱 아이러니인 것은 저는 그 10년을 슬쩍 앞서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편향된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저는 우리 나이로 31세입니다.
선생님의 주장의 대부분은 저의 생각과 맞지 않지만, 이 세상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어야 한다고 믿기에 이러한 주장에 대한 저의 의견을 피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선생님의 주장 중 제가 가장 수긍할 수 없었던 것은 현재의 청소년들이 이념적으로 백지상태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재의 청소년들은, 과거의 청소년인 저나 선생님이 이념적으로 백지상태가 아니듯 백지상태가 아닙니다. 이미 충분하다 못해 과도하기까지 한 교육으로 ‘깜지’가 만들어졌습니다.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심지어 유치원만 나와도 할머니와의 대화가 끊이지 않을 정도의 지식을 습득하고, 할머니들은 손자녀들의 말솜씨에 혀를 내두릅니다. 이들에게 백지상태라는 말을 하는 것은 지금까지 받은 교육이 전혀 쓸모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요.
제가 보기에 그들은 백지상태라기보다는 보수파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보수파의 뜻은 현재의 안정 상태가 뒤집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이는 저도 동일합니다. 그들이 현재의 안정을 침해당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가장 큰 증거는 바로 ‘미국산 또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를 위한 촛불시위’입니다. 그들은 반미주의자이므로 ‘미국산’ 소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치 못한 쇠고기를 먹고 생길지 모르는 병적인 불안정 상태를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처럼 안전하게 먹을 가능성이 보장됐다면, 또 수긍할 수 있는 조치들로 조금더 신속하고 조금 더 철저하게 보완됐다면 모든 상황은 안정됐을 것입니다.
지금은 여전히 이들에게는 그리고 저에게도 불안정상태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미국산 쇠고기는 일사불란하게 수입되고 있으나 창고에 쌓이는지, 들어오자마자 버려지는지 그 어느 식당에도 이를 파는 곳이 없습니다. 모두 호주산이나 국산입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이 분단의 원인’이라거나 ‘주한 미군은 점령군, 한미동맹은 외세의존적, 대미종속적 침략동맹’, ‘시장경제는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반면 계획경제는 일반적으로 경제안정 면에서 시장경제보다 우월하다’, ‘주체사상을 토대로 한 우리식 사회주의는 당면한 문제를 자체의 힘으로 해결하는 이념’이라는 기술들은 치우친 관점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과연 따오신대로 떼어서 밑줄을 치고 자신의 세계관의 근거로 삼는 이들이 몇이나 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저는 ‘대한민국의 건국은 당시 연합군의 적(敵)인 동맹군 점령지역 분점과정이 하나의 영향요인을 제공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며,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의 성격은 세분된 시기별로 다르고,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며, 같은 시기에도 매우 가변적이고 다양한 성격으로 얽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시장경제는 적절한 계획경제 요소의 조합이 없으면 빈부격차를 심화시킬 수 있고, 계획경제 역시 시장경제 요소의 적절한 조합이 없으면 정체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봅니다.
‘우리식 사회주의’ 운운하는 부분은 아무래도 원래의 교과서 본문을 더 살펴야겠지만 북한의 주장을 소개하는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논리나 반박논리, 유사한 논리적 오류를 소개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봅니다.
역사학은 법학과도 비슷해서 실체론과 합의론의 관점이 끊임없이 대립돼 되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현대사일수록 합의론이, 고고학이 중요한 고대사일수록 실체론이 관점의 면에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이 현재의 역사학이라고 할 때, ‘비가 온다’는 매우 단순한 현상은 상습침수지역의 주민에게는 근심, 가뭄을 겪는 논밭을 일구는 농민에게는 해갈의 기쁨이라는 매우 편향적인 의견을 갖게 만듭니다.
하물며 세계적으로 또 한국적으로 중요하고 커다란, 그래서 몇 가지 의미가 셀 수도 없이 중첩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하나의 시각으로 정연하게 풀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사건에 대한 분절된 기억을 가진 이는 셀 수도 없이 많은데, 어떻게 이들이 같은 시각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인지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하나의 사건이 있다면 역사적으로 이를 평가할 수 있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종종 합의와 수렴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하나의 책을 깡그리 없애고, 하나의 책을 대체재로 세우는 것이기보다는 두 주장을 함께 싣든지 다른 주장의 두 책을 모두 교재로 사용하면서 이를 비교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는 학생들의 사고를 조금 더 유연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의미에서 청산대상이 된 그 교과서들의 존재의미는 충분합니다. 물론 그 반대의 관점에서 쓰인 교과서도 함께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연히 평가해야 하는 부분을 평가하지 못했다’고 보는 측과, ‘축소 내지 외면할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보는 측이 동시에 존재해야 논리의 경쟁을 통해 학문이 발전합니다.
법실증주의만 존재했다면 법학의 다양한 조류는 더 이상 배우지 않아도 됐을지 모를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지금의 풍부한 역사의 내용을 만들어 온 것입니다. 더구나 현대사일수록 유물·유적보다 기억과 이에 중첩된 의견이 역사의 내용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하나의 사실에 여러 개의 주의 주장이 덧붙는 경우가 당연히 많습니다. 다양한 의견을 동시에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좌편향적 역사관’, ‘우편향적 역사관’, ‘균형잡힌 시각’, 이 모두는 동일하게 의견이나 주의·주장일 뿐입니다. 이를 절대화시키는 것은 종교나 신앙일 수는 있으되 ‘역사’라고 보기는 곤란합니다. 특히 현대사에 있어서의 ‘균형’이란 ‘단 하나의 실체적 진실’을 찾아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이를 알아보기 위해 눈대중으로, 또는 팔뚝 짐작으로 재는 것은 더욱 더 균형일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지금 선생님이 하셨듯이, 그리고 제가 하고 있듯이 어떤 논리에 대한 ‘같은 비중의 다른 시각으로 생각한 논리’가 있어야 ‘균형’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 커다란 국가만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자신의 행동과 생각에 반성해야 할 부분은 있습니다. 이에는 선생님과 제 생각이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행동에도 반성할 부분과 평가할 부분이 동시에 있습니다. 긍지는 이 두 가지의 과정을 확실하게 거친 이에게 의미 있는 것입니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도 그렇습니다. 공고히 해야 안보관계가 더 유리해지는 것은 맞겠지만, 친구관계에서도, 연인·부부관계, 심지어 부모자녀 간에도 친소관계의 줄다리기가 필요한 게 요즘의 현실입니다. 하나의 국가와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 그런 부분이 없겠습니까. 저는 한미동맹은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보는 것이 학문적으로 온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교과서는 더 이상 ‘개혁’이나 ‘청산’의 대상이 아닌 ‘다양화’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따오신 ‘편향된 교과서’의 주장은 우리나라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로 보기보다는 ‘이런 잘못도 한 존재’라고 보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는 2차 대전 후, 6·70년대의 일본교과서가 일본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로 본 것이 아니라 ‘이런 잘못도 한 존재’라고 보고 있으므로 ‘잘못까지 분칠해 볼 의도로 하는 교과서 개악을 중지하라’고 주장할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나 중국, 이외의 동남아 여러 피침략국에게는 매우 소중한 역사적 평가 지점입니다.
성공의 역사가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열 번 시도 가운데 열 번 모두의 성공으로 모아진 역사이어서가 아닙니다. 실패와 좌절, 위기를 넘고 이를 통해 성공의 계기와 발판을 만들었고, 이를 성공으로 연결시켰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의 언급 가운데, ‘반 대한민국적’ 역사교육의 ‘반’이 ‘反’이 아닌 ‘半’이라고 생각합니다. ‘半’의 보장을 위해 다른 ‘半’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존재는 저와 비슷한 생각, 또는 선생님과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의 존립근거입니다. 저나 또는 선생님과 다른 생각을 하는 또 다른 이들 역시 선생님의 존립근거가 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저는 그래서 다른 편에서 보면 여전히 ‘편향된’ 선생님의 ‘나쁜 교과서 퇴출과 좋은 교과서 제작’ 주장에 반(半) 밖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나쁜 현대사 교과서’ 는 없습니다. 이는 ‘나쁜 신문’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의 편향성을 선생님이 거울처럼 반영하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한겨레’, ‘경향’이 있어야 ‘동아’, ‘조선’이 그리고 ‘문화’가 의미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교과서’를 만드는 것은 동의할 수 있습니다. 단, 전제조건은 붙어야 합니다. ‘좋은 교과서’의 고유논리를 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나쁜 교과서의 퇴출’이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현대사는 역사관과 법관, 사회관의 결집체인데 이를 일원론으로 귀일시킬 경우 결국 우리의 ‘우편향 역사관’에서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는 것처럼 보이는 ‘북한의 주체사상, 일본의 천황제일주의, 독일의 국가사회주의’가 가는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조선·대한제국의 멸망도 붕당정치의 견제와 균형 원리가 깨진 상태인 일당독재, 더 나아가 세도정치가 만성화되고 100년여를 지속된 끝에 부패가 구조화·고착화돼버려, 지배층이 자제력을 상실한 점이 일본에 틈을 주게 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틈을 노려 침략을 한 자의 잘못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측에서도 부패 고착화에 대해서는 반성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반성은 자학이 아닌 실패와 좌절을 발전과 성공의 발판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조강희 기자 newshound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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