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나도 영화의 끝부분에서 말할 수 없는 허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찝찝함이 내게 “이 영화가 주고자 했던 게 무엇인가?”를 더 생각하게 만들었고, 그 생각이 이 글을 쓰는 기초가 됐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 영화는 매우 잘된 작품이다. 감독이 이 영화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만큼 잘 된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못된 작품이다. 내가 이렇듯 영화를 모순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성격이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후 그 순간이후로도 조금 더 길게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점에서는 일단 성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영화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방식인 ‘보기’ 그 자체가 상당히 불편하고, 의도적으로 삽입한 몇 가지 장치가 눈에 거슬린다는 점에서 주었던 점수를 거둬들이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한다.
조금 더 길게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점은 몇몇 사람에게는 여전히 유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이 영화를 본 직후 반응이 ‘긴 한숨’이었다. 영화를 보던 전날의 피로감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하필, 대체 왜 이 영화였나?’에 대한 원망이 더 컸다. 단적으로 이 영화는 ‘재미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역시 ‘재미’에 대한 갈망이 그 누구보다도 크다. 그렇기에 ‘재미만 있으면 모든 게 다 용서된다’는 측에 가담하는 사람일수록 이 영화에 대한 불쾌지수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는 뭐니뭐니해도 시각적(visual)인 면이 생명’이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도 ‘클로버필드’는 성에 차지 않는다. 희뿌연 영상, 계속해서 초점이 흔들리는 카메라의 시각은 약간 특이한 예술적 감각을 가진 이들도 멀미 증세를 호소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또는 미래에 평가될 수 있는 한두 가지 항목은 있다. 그 중 하나는 이 괴수가 선인지 악인지, 주인공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것이 이 영화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우리가 괴수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당신을 위협하고, 이 세상을 위협하는 크고 위험한 괴수가 당신의 앞에 나타났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답변이 바로 영화 ‘클로버필드’의 이야기이다.
‘트랜스포머’를 보면서 당신은 디셉티콘에게는 뭔지 모를 적개심을, 오토봇에게는 역시 뭔지 모를 우호적 감정을 드러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그러나 이건 어쩌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영화에서 상정한 가상의 존재에 대해서는 우호적 감정과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공상과학영화 또는 괴수영화의 딜레마다.
클로버필드는 이러한 딜레마를 깨 보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괴수가 실제로 나타난다면 과연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시각적인 즐거움을 중시하는 ‘공상과학+액션’영화에서는 경찰 한 두 중대나 대대가 진을 치고, 전차와 헬기 등 군용 장비가 몇 대 투입되고, 다리가 몇 개 부서지고, 건물이 몇 채 무너지고, 사람들이 몇 백 명 죽고 다치고 하는 ‘사소한’ 상황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된다. 심지어는 죽고 다치는 사람들이 어떤 잘못을 했다는 식의 설명까지도 거침이 없다. 거대한 괴물들이 인간이나 그 외의 다른 적을 상대로 싸움이라도 할라치면 최소한 20m 상공에서 모든 상황을 생중계 해주는 정도는 껌 씹듯 쉽다.
그러나 현실은 절대로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몇 개의 건물이 무너지고 그 건물에서 몇 백 명의 사람이 다친다는 상황은 매우 ‘중대하고 긴박한’ 성질의 사건이다. 또한 그 괴물이 거대하다면, 우리는 그 괴물의 전체적인 모양새를 판단하기가 매우 곤란할 것이다. 그리고 그 괴물에 대해 말을 건다거나, 괴물이 우리들에게 우호적인가 적대적인가를 파악하는 일은 ‘공상’이 아니라 ‘망상’일 것이다. 가장 평균적인 미국의 소시민이 그토록 위험한 상황을 지혜롭게 잘 대처해 영웅이 되는 일은 있을 수는 있겠으나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 괴물을 본 후, 빠른 시간 안에 평상적인 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터진 일을 수습만 하기에도 바쁜 상황에 국내외 조사진을 가동해서 괴물체에 대한 자료를 서너 시간 만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내는 것은 아무리 미국이 초강대국이라 한들 불가능한 일이다.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정체를 알아냈다는 사실이 그 상황의 위협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클로버필드’는 괴물이나 공권력과 같은, 너무 거대해서 도통 한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것들을 한 눈에 들어오도록 하는 작업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외계생명체에게 영어를 가르쳐보겠다는(혹은 그 반대상황의) 말도 안 되는 야심도 버렸다.
그보다는 정말 중요하고 있을 법한 상황에 렌즈를 들이댄다. 괴물들이 실제로 출현하면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건물이 부서지고, 사람들이 다치고, 사고상황에 이산가족이 되면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여과없이 보여 준다. 위급 상황에는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은 기본이요, 몸이 다친 상황에서도 위급하면 뛸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이 나온다는 사실도 보여 준다.
그런 의미에서 살펴보면 클로버필드의 주인공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정체모를 괴물 출현’이라는 위급에 처한 일반시민들이다. 영화가 그 시민들 중에서 우연히 카메라를 들게 된 한 청년과 그 주변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적절해 보인다. 조촐한 송별회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그 상황을 기록하게 된 ‘영상 속 주인공들’도 결국은 일부만이 살아남는다. 적어도 그 영상이 기록한 그 부분까지는.
클로버필드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사실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설정에 있어서는 철저히 허구적이지만, 그 허구성을 관객과의 합의하에 의도적으로 비틀지 않고 사실적으로 만들어 보기 위해 무척 애쓴 작품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도 허점은 있다. 아슬아슬한 위기상황을 극복해 가는 장면들이 그것이다. 물론 그런 극복장면들이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수준은 아니고, 이 고비를 넘기면 더 큰 고비가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 이런 단점을 상쇄시키기는 한다.
예를 들면 제한지역에 대한 출입허가를 별 어려움 없이 받아낸다든가, 무너져버린 아파트에서 사랑하는 애인을 우여곡절 끝에 구해 온다든가 하는 상황 말이다. 이런 장면들은 사실상 새로운 시각에 기초한 접근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경찰은 어떤 상황에서도 제한지역 출입허가를 해 주지 않는다는 설정과 제한지역 돌파를 위한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그 상황에서는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물론 괴물을 맞딱뜨리면서 ‘산산이 좌절되는 꿈’이 아슬아슬한 사실성의 균형을 되찾아 준다.
사랑하는 애인을 구해오는 설정은 정말이지 아슬아슬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30도는 족히 될만한 각도로 기울어진 건물에서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길을 찾아내는 것은 과연 사실적일까? 비록 ‘초인적인 힘을 낼 수 있는 위급상황’이 이러한 설정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고는 하지만 찜찜한 기분은 지우기가 어렵다.
무리스러웠던 또 하나의 설정은 소형 카메라로 촬영된 영상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 분명한 삽입한 ‘화면 조정’ 장면과, 후반으로 가면서 중간 중간 삽입된 ‘이전에 촬영된 영상’장면이다. ‘화면 조정 장면’은 어쩔 수 없었다 치고, 다 다시 촬영되고 맨 뒷부분과 맨 앞부분에서만 보여줬어도 되는 ‘이전 영상’이 작위적인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영화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작품은 논란의 중심에 가고, 이러한 위력을 업고 흥행까지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논란의 중심에 서진 못할 것 같다. 고로 흥행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대신 비평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후세에 평가받게 될 작품’이라는 식의 분석대상이 되는 영예 정도는 차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이 글도 이 영화를 분석하고 있고, 게다가 지극히 주관적인 시각에서 잘 되고 잘못됐음을 지적하는 글인 것이다.
물론 예고편은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게 만드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논란의 중심에 설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영화가 ‘이해’와 ‘감동’이란 면에서 감독과 배우 등 제작자의 시선에 지나치게 가까이 가 있기 때문이다. 보아주고 평가해줄 관객들의 시선을 별로 고려하지 않은 티가 많이 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발생할 때 너희들이 겪는 문제를 너희들이 실제 생각하는 식으로 다뤄 봤어. 보기 싫어? 안 보려면 말고.’ 하는 식의 퉁명스러움이 배어난다.
조심스럽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영화가 극복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는 문제가 영화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감독이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작법을 깨겠다’는 의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확하다. 그런데 영화는 적어도 관객이 그렇게 이해하도록 제작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화가 그 작법을 온전히 벗어버릴 수 없었다. 시도는 참신했지만, 결과물은 그리 신통치만은 않다는 것이 이 영화에 대해 내가 내릴 수 있는 평의 전부다.
혹시 흥행되더라도 그 흥행은 기이한 것으로 평가받는 감독의 시각에 대한 기대감에 영화표를 구매한 이들의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혹시 예술성이 인정받더라도 전체보다는 부분에 무게가 간 예술성이리라.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 후 굉장한 자신감을 가지고 이 영화를 내놨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제껏 없었던 영화, 이제까지의 모든 기법을 부정하고 모든 것에 새롭게 접근한 영화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을 것이다. 그런 자부심의 발로였을까? 언론시사회에서 배급사측은 소지품 검사까지 해 가며 휴대폰을 포함해 촬영이 가능한 장비를 상영관 입장 전에 모두 수거했다. 나중에 그 장비들을 돌려받으며 속으로 실소를 흘린 기자가 나 혼자만이었을까?
24일 개봉. 15세 관람가.
조강희 기자 (newshound7@gmail.com)
2008/01/17 ■ 23:03
2008/01/17 ■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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