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보고 싶다! 깨끗한, 그래서 떳떳한 우리나라

<작은 정부, 자정 능력, 그리고 한반도운하>

‘작은 정부’란 본래 국민의 조세부담을 낮게 억제해 운영하는 정부의 존재형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현대국가에서는 행정기구를 합리화·간소화해 능률적인 정부를 만드는 것으로 바뀌게 됐다. 물론 이것의 중요한 전제조건은 있다. 바로 투명한 행정문화다. 작은 정부에서 이상적으로 삼는 행정인이 국민의 직간접적 통제를 받는 사람이라는 점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렇다면 현대 국가에서 작은 정부의 전제조건은 합리성·간소성·투명성이다.

현 정부의 ‘작은 정부’ 개념은 잘못됐다

그러나 정부조직 개편의 광풍이 한바탕 지나간 2008년 2월 말의 대한민국에서 과연 이와 비슷한 의미의 작은 정부가 논쟁의 중심에 있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 입안자들은 이와 같은 작은 정부의 참뜻은 파악하지 못한 채 ‘작아 보이는 정부’를 만들기 위해 애썼던 흔적이 역력하다.

일단 이명박 정부의 조직개편은 어떤 식으로 국민의 세금을 줄일지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부처의 수를 줄이는 데 집중했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부처의 수를 줄인다고 세금이 줄어든다면 부처의 수를 몽땅 없애더라도 세금만 줄이면 유능한 정부가 되는 일이 성립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현실에서는 없다, 그렇듯 작은 정부는 부처의 수를 줄이면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만약 그런 식으로까지 작은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면, 도대체 ‘작은 정부’, ‘어중간한 정부’, ‘큰 정부’의 기준은 각각 몇 개의 부처인지 묻고 싶다. 부처의 수는 작은 정부의 본질이 아닐 뿐 아니라 ‘표피 중의 표피’에 불과하다. 심지어 전혀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모순이지만,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야당과 거래를 통해 부처 수 조정을 매듭지음으로써 조직개편의 진의가 작은 정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인했다. 만약 그들이 진정한 의미의 작은 정부를 염두에 두고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면, 야당 뿐 아니라 국민모두가 납득할만한 설득력 있는 조직개편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급속하게 졸속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다는 사실은 제대로 준비가 안 된 부처의 이름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지식경제부 등 개편되는 일부부처의 영문명은 그 적절성에 대해 여전히 비판받고 있다. 또한 폐지·흡수 부처의 사무분장과 필요성에 대한 야당의 공세에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못한 것도 그들의 연구가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과정을 떳떳이 밝힐 수 없는 이들의 ‘빽’

부처의 수가 많건 적건 모든 일이 공명정대하게 처리되는 것이 작은 정부의 목표인 행정의 능률화다. ‘행정의 능률화’와 ‘작은 정부’가 밀접한 이유는 큰 정부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인 ‘규제’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일의 ‘공명정대한 처리’가 없는 국가에서는 필연적으로 규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자율에 맡기면 벌어지는 결과가 뻔하니 제 3자인 정부가 개입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규제는 정부의 몸집을 불려 놓는다. 그러나 그러한 규제 또한 소용이 없는 이유는 그 규제권자 역시 규제를 받는 사람에게 물들어(혹은 똑같아서) 결국은 한통속이 되고 마는 때문이다.

결국 작은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는 규제를 풀어야 하고, 규제를 풀기 위해서는 투명성·공정성이 담보돼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투명성과 공정성이 확보되기 위해서는 자정능력이 중요하다. 그러나 청와대의 첫 조각 인선과정을 보는 이들이 또 한 번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은 과연 이명박 정부가 자정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자정능력에 대한 의심은 ‘부동산이 많은’, 기천만원짜리 골프회원권이 ‘싸구려’인 데 대한 가난한 자의 복수심이 아니다. 부자는 모두 자정능력이 없다는 결정은 누구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많은 부동산이 생긴, 혹은 기천만원짜리 골프회원권이 싸구려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만들어 온 과정을 떳떳이 밝힐 수 없는 부자라면 얘기가 다르다.

물론 그 과정을 ‘꼿꼿한 자세’로 이야기한 이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밖으로 보이는 태도가 ‘떳떳함’과는 다른 것은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라며 대중들의 뒤에 숨어 자신을 변호하려는 모습 때문이다.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수 있는 일들을 ‘남들과 같다’는 이유로 눈감아 줄 수 있는 사회는 과연 자정능력이 있는 사회인가? 게다가 떳떳하지 못한 자신을 만들어온 과정에 대해 사과할 용기마저 없다면 마지막 남은 자정능력의 불씨마저 사라지지 않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자정능력’의 실제사례를 계속 보고 싶다

자정능력이라는 말 때문에 문득 떠오른 단어는 ‘운하’였다. 운하는 고여 있는 물이므로 썩을 수밖에 없다는 어느 교통전문가의 말도 떠올랐다. 그런데 썩을 수밖에 없는 물로 가득 찬 운하가 우리나라에 만들어진다는 소문이 난 지가 꽤 오래됐다. 한반도운하는 추진 측의 계획대로라면 우리 국민의 80%가 먹는 한강과 낙동강을 이어서 만들어지게 된다.

결국 한반도운하계획은 자정능력이 있는 ‘강’을, 자정능력이 거의 없는 ‘운하’로 만든다는 것이다. 여론이 좋건 나쁘건 민자사업으로 건설사가 챙길 수익성만 있으면 밀어붙일 준비가 돼 있는 그 운하를 무리하게 추진하려는 이유는 추진 측에서는 ‘한반도선진화’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투기꾼과 지역의 땅부자, 그리고 정부의 직간접적 투자(재정, 세금)를 받게 될 대기업 건설사들의 이익과 한반도의 선진화가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변은 이제껏 없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혹시나 운하 계획은 ‘자정능력’이라는 단어를 그저 사전 속에나 있는 단어로 만들려는 의도는 아닐까? 80%의 국민이 먹는 물을 흐르지 않는 물로 바꿔 자정능력의 실제 사례를 볼 수 없게 만들고, 종국에는 그 개념 자체를 국민들의 머릿속으로부터도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기를 쓰고 운하를 파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만약 끔찍하게도 한반도운하가 우리나라 수질환경오염의 총본산이 돼, 자정능력이라는 말이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지워지게 되는 일이 실제로 발생하면, 우리들은 ‘작은 정부’라는 말도 잊어버려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작은 정부’라는 말을 잊은 사회는 바라보기에 따라서는 아무런 논쟁도 싸움도 없는 매우 이상적인 사회일 것이다. 논쟁이 있기는 해도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를 두고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고민거리가 하나 줄어든 사회 정도는 될 것이다. 그러나 투명성을 제외한 작은 정부의 대전제 중 하나가 합리성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바라보기에 따라서는 절차도 규정도 없는 살육의 현장이 될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부디 자정능력이라는 말도, 그것의 실제사례도 계속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정치현장에서건, 자연환경에서건 그것이 화려한 수사법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제대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 사회라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바탕이 돼야 공정하게 일하는 방식이 우리들의 몸에 배어 더 이상의 규제도, 세금낭비도 줄여나갈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진짜 ‘작은 정부’다.

조강희 기자 (newshound7@gmail.com)

2008/02/28 ■ 20:22 ⓒ 2007 Newsh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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